두 청지기

•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역시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비유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고(눅 16:1)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 줍니다(눅 16:5–7). 청지기의 본분을 잊은 나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눅 16:8)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청지기가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이 왜 지혜롭냐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수많은 해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청지기는 빚진 자의 이자 부분만 탕감해 주었는데, 이 행동이 율법을 따라 본래 이자를 받으면 안 되는 주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이기에 칭찬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청지기가 탕감해 준 부분은 본래 자기가 받을 몫이었는데 이를 탕감해 줌으로써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도 자기 미래를 대비했기에 칭찬을 들었다고 해석합니다. 각각의 해석이 나름대로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

이 말씀은 청지기의 행동이 선한가, 악한가가 비유의 핵심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을 대표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악한 자들을 가리키며 (눅 7:31; 9:41; 11:29, 50; 17:25 등), 당연히 예수님의 자녀인 ‘빛의 아들들’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눅 2:32). 따라서 비유 속의 청지기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그 행동 자체가 하늘의 기준으로 볼 때 무조건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눅 16:8)이라는 조건을 다신 것입니다. 결국 청지기는 말 그대로 “옳지 않은 청지기”(눅 16:8)일 뿐입니다.

비유에 나온 청지기의 행동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이 악한 청지기의 행동 중 특정 부분만큼은 제자들도 배워야 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악하지  그 속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부분을 배우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종종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눅 18:1)하실 때, 기도를 받는 대상으로 “한 재판장”(눅 18:2)을, 기도하는 자를 “한 과부”(눅 18:3)로 설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눅 18:2) 악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애초에 이 재판장을 “불의한 재판장”(눅 18:6)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옳지 않은’과 이 ‘불의한’은 같은 단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악한 재판장에게서 하나님과 닮은 일부분을 뽑아내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눅 11:13도 참조).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를 읽을 때도 제자 된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만 선별해서 적용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눅 16:8)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런 걸까요? 

 

먼저, 미래를 대비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인의 최후통첩을 받고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쫓겨나면 들어갈 집도 없습니다(눅 16:4).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참담한 미래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미래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인생은 짧고 허무합니다. ‘곧 죽을 부자 비유’(눅 12:16–21)에서 보았듯, 땅에서의 목숨과 시간은 실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이 언제 거두실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현재의 삶은 미래의 심판을 대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악한 일을 저질렀으므로 땅을 파고 빌어먹을 운명(눅 16:3)과 쉴 집이 없는 운명(눅 16:4)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 죄를 짓고 끝내 지옥의 심판을 겪어야 할 인간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곧이어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에서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불꽃 가운데서 괴로워”(눅 16:23–24)하며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을 구걸합니다. 곧 닥칠 가련한 운명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를 피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자가 지혜롭습니다. 청지기에게 배울 만한 태도는 바로 미래를 염려하고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청지기는 운명을 극복하려고 아직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재물의 권한을 ‘빚진 자’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가 탕감해 준 것이 빚의 이자이든 자기가 받을 몫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가 아직 가지고 있는 재물의 권한을 주변 빚진 자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반복된 누가복음의 ‘구제 사상’과 직결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뿐 아니라 누가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자기 소유를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문제는 이 구제 행위가 단순한 선행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정결함에 이르는 길이자(눅 11:41), 하늘의 영원한 보물을 쌓는 방법이며(눅 12:33), 나아가 영생을 얻는 것(눅 10:25,28)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구제 행위가 이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에 녹아 있습니다. 청지기는 재물에 대한 마지막 권한으로 주위의 빚진 자들을 도왔습니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상통합니다. 

 

혹자는 빚진 자의 ‘기름 백 말’(약 2,100리터, 눅 16:6)과 ‘밀 백 석’(약 39,000리터, 눅 16:7)은 상당한 양이기에, 이들이 가난하지도 않고 도움도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빚은 오히려 그들을 완전히 몰락하게 만들 거대한 폭탄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청지기가 가장 쉽게 만나 도울 수 있는 ‘이웃’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행 도중에 강도당한 자를 만나자 곧 그를 섬긴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미래의 심판을 대비하고 이를 위해 자기 재물을 주변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일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불의한 재물’입니다. 동시에 끝내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므로 ‘없어질 재물’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재물이 있을 때 ‘친구를 사귀는 일’에 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 자기 소유를 드려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 되어 준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자기 재물을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면 결국 그 도움을 받은 친구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눅 16:9)할 것입니다. 영주할 처소는 영원한 천국을 상징합니다. 이 말씀 역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이웃 사랑이 영생과 직결됨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영생 얻을 성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로 이 땅의 이웃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일에 충성하는 자가 천국에서 ‘참된 것’(눅 16:11)과 ‘나의 것’(눅 16:12)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재물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눅 16:13).

끝으로 예수님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지혜로움이니라”(눅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에 걸쳐 등장한 ‘지혜롭다’는 누가복음 본문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에 빗대어 제자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참 청지기의 지혜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 참된 종 비유(눅 17:5–10)

 

주인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눅 17:7)이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무척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은 그를 보고 수고했다며 식탁에 “곧 와 앉아서 먹으라”(눅 17:7)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금 일터에서 돌아온 종에게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눅 17:8)고 말합니다. 종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주인의 행동이 불만스러울 수 있습니다. 주인이라고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주인의 요구는 부당하기까지 합니다. 그 종은 요리나 식탁 시중 담당이 아니라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인의 태도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만약 종이 불만을 느낀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입니다. ‘주님’은 글자 그대로 ‘주인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면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신약성경의 ‘종’은 ‘뒬로스’(δοῦλος)인데 이 말은 ‘묶다’라는 뜻의 ‘데오’(δέω)에서 왔습니다. 종은 본래 주인에게 묶인 자로, 사실상 소유물입니다. 주인은 명령하고 종은 순종할 뿐입니다. 이를 잘 나타낸 표현이 백부장 이야기에 나옵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8). 종은 명령에 순종할 뿐 권리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은 이처럼 철저한 노예 상태를 의미합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채찍질당하고 쓸모없다고 판단되면 주인이 죽여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그 시대의 종입니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한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성경이 말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남들이 자기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윽박지릅니다. 하지만 그가 진짜 종이라면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어떻게 먼저 잘 순종할까 고민함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종이 벼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을 주인이라 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주인에게 명령합니다. 겉으로는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지만 입술로는 ‘주님은 나한테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언하십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눅 17:9). 오늘날 그릇된 태도로 주인을 섬기는 모든 성도에게 예수님이 진심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과 봉사를 했는데도 아무 보상이나 칭찬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마음이 상하여 삐딱한 자들이 있습니다. 종의 교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순종을 통해 보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그릇된 자세입니다. 주님은 주인이시고 종은 노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무익한 종’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이때의 종은 주인의 진노를 사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마 25:30)길 존재입니다. 주인의 명을 거역한 진짜 ‘무익한 종’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종은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종 역시 본래는 똑같이 ‘무익한 종’일 뿐임을 가르치십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에 모두 순종해도 주인이 소유물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이 명령을 이행하든 안 하든 그의 운명은 오직 주인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라는 요청을 받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결국 참되고 깊은 신앙은 주인을 향한 겸손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인의 주인이시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자 소유물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폐기처분이 확정되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랑으로 은혜를 입어 다시 주인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다시 교만해지면 그때는 정말 쓸모없는 종이 되고 맙니다. 능력과 재능이 출중해서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루어도, 주인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경준. (2018). 신약정독: 복음서 편 (초판, pp. 292–300). (04084)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4길 3: 주식회사 홍성사.